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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우연일까? 청와대-용산 대통령실 관통했다, 이 선의 비밀 [청와대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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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 바퀴(시설물과 등산로)
▶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 3-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 바퀴
▶청와대 백과사전 4-전면 개방까지 83년
▶청와대 백과사전 5-보이지 않는 물길
▶청와대 백과사전 6(끝)-청와대에서 용산까지

 

 

 

 

 

 

 

북한산과 관악산 꼭대기를 이어보니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니터에 지도를 띄웠다. 북한산 꼭대기인 백운대와 관악산 꼭대기인 연주대를 선으로 연결해 보았다.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직선 위에 청와대-경복궁-덕수궁-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놓여있다. 서울시청, 서울역, 용산역, 동작동 서울현충원도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국역사의 핵심을 압축하는 중심축이라 할 만하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역사의 필연일까. 마침 대통령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가면서 풍수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대통령집무실 이전 얘기는 없었다. 가운데 아랫부분 비어있는 땅이 용산 미군기지다. 집무실은 그 안에 있다. [강북 전도] 부분. 2021년작. 


수도를 옮기는 뻔한 이유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조선을 연 이성계는 개경(개성)을 뜨기로 결정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의지였다. 수도 이전은 왕조 교체기 혼란상을 한방에 잠재우는 이슈 블랙홀이었다. 천도는 기득권 세력의 간섭을 건너뛰며 단숨에 판을 바꿔버렸다. 서슬 퍼런 최고 권력자가 남을 사람은 남아라, 나는 한양으로 간다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권력 중심이 이동하면 주변 시스템이 함께 옮겨간다. 이때부터는 이전 반대가 아니라 어떻게 이전하느냐가 논의의 중심이 된다.

 

 

 

 

 

 

 

 

 

 

 

 

 

 

 

역사 속의 수도 이전은 왕조 교체가 주된 이유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와 안보 이유가 크다. 브라질 수도는 본래 리우 데 자네이루였다. 5년간의 공사를 통해 1960년에 브라질리아로 옮겼다. 리우에서 900km 떨어진 해발 1100m에 세운 도시다. 국토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 내륙개발 거점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파키스탄은 1960년 카라치에서 내륙 깊숙한 이슬라마바드로 수도를 옮겼다. 과밀해소를 내세웠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의 권력 안보 목적이 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러시아는 키이우 함락을 노렸다. 국경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실패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2019년 인도네시아는 자바섬에 있는 수도 자카르타를 북동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보루네오섬 동칼리만탄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구집중과 과밀개발로 자카르타는 도시 지반침하가 심각하다. 동부 개발로 국토 균형발전을 하려는 목적도 있다.

 

 

 

 

 

 

 

 

 

조선의 한양 천도 목적은 신권력의 조기 안착이었다. 그 논리 기반이 풍수도 참사상이다. 신라 말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도참 사상은 고려를 거치며 정교해졌다. 불교 나라에서 유교 나라로 바뀌었지만 풍수의 힘은 여전히 셌다. 조선의 지리학 시험에 풍수 과목도 있었으니 정식 학문 과목이었던 셈이다.

 

 

 

 

 

 

 

본래 이성계가 정한 도읍지는 지금의 계룡시 자리다. 풍수도참에 밝은 개국공신 하륜이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한다고 건의해 공사를 중단했다. 하륜은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를 명당으로 찍었다. 무학대사와 관료들은 산세가 약하고 터가 좁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도읍 자리는 백악산 아래가 됐다. 이번엔 무학과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붙는다. 무학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해서 동향으로 대궐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백악산이 좌청룡 남산이 우백호라는 주장이다.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성공한 중국 황제들은 남쪽을 보고 앉아 사방을 다스렸다며 백악산을 등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왕산을 우백호, 낙산을 좌청룡으로 하는 서울 골격이 이때 정해졌다. (풍수에서 말하는 좌우는 지도에서 좌우의 반대다. 지도는 남쪽에서 북쪽을 보지만, 풍수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을 본다)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야사가 섞여 있는 이야기이니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 수 없다. 개국 초에 유교와 불교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이 풍수 논쟁으로 옮겨 붙었을 테다.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려는 움직임은 고려 중기부터 있었다. 숙종(1095~1105년)은 지금의 서울인 양주목의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다. 조사단은 노원, 용산, 도봉 땅은 도읍으로 삼기에 부족하고 백악산 아래가 괜찮다고 보고했다. 전성기를 지나며 문벌귀족과 무신 세력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던 시기였다. 분위기를 바꾸고 영광이여 다시 한번을 노린 계획이었다. 후대 왕들도 남경(한양)을 오갔으나 이미 천도는 동력을 잃어갔다.

천도 뒤에는 풍수 논리

 

 

 

 

 

 

 

 

 

 

 

 

 

 

 

 

풍수 논리는 서울 곳곳에 숨어있다. 그 하나가 보토소(補土所)다. 지도를 놓고 보면 백악산은 백두산에서 굽이쳐 내려온 수많은 능선의 끝가지 중 하나다. 산맥은 때로는 숨차게 때로는 숨을 고르며 달려온다.

 

 

 

 

 

 

북한산에서 뻗어온 보현봉 가지 하나가 백악산으로 내려올 때 형제봉을 지나며 급하게 떨어진다. 평창동과 정릉을 잇는 북악터널 위쪽이다. 왕실에서는 이곳의 지형이 낮고 잘록해 맥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도성과 궁궐의 지맥을 북돋고자 보토(補土 흙을 채워 메움)를 하고 여기에 총융청 관할 보토소(補土所)를 두었다. 형제봉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심곡암과 영불사 중간쯤에 있는 ‘보토 고개’가 그 흔적이다.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는 보현봉과 백악 사이에 ‘보토소’가 나온다.

 

 

 

 

 

 

 

 

 


광화문 해태상과 숭례문 세로 현판은 관악산 화기를 막고자 함이고, 좌청룡의 허약한 산세를 보완하려 흥인문 현판에 지(之)를 더해 흥인지문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익숙하다.

북악산 등산로 중간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서울 도심을 바라보는 시민들. 김상선 기자

일제 쇠말뚝 뜨거운 논란

일제의 조선 강점 과정에서 풍수와 얽힌 숱한 논란이 생겼다.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대포에 눌려 강제 개항한 일본은 서구 과학기술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한자문화권 공통의 풍수 관념에서도 먼저 벗어났다. 하지만 한반도를 침탈하며 조선 풍수에 주목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한 무라야마 지준이 쓴 책 『조선의 풍수』에 나온다는 말이다.

 

 

 

 

 

 

 

 

 


“… 풍수가 적어도 십 수 세기란 오랜 기간 한국 민속신앙 체계에서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이조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나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타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함과 폭이 넓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전국의 명당자리에 있던 태실(왕손의 태를 묻은 자리)을 파괴하고 고양시 서삼릉에 모아놓았다. 비석 뒤에 일본의 연호를 새겨 넣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왕실의 전통과 맥을 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일제가 풍수 침략을 계획했다는 의심은 이어진다.

백악산에서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숙정문 못 미쳐 촛대바위가 있다. 여기서 정남 쪽에 경복궁이 있다. 바위 꼭대기에는 길쭉한 돌이 박혀있다.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그 자리를 메운 돌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속리산, 추풍령, 북한산…. 한반도 어디나 일제가 혈에 말뚝을 박고, 길을 내며 지맥을 잘라 인재 배출을 막았다는 얘기는 흔하다. 일본에 앞서 임진왜란 때 명군을 끌고 온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았다든 얘기도 감초처럼 전해진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1995년(광복 50주년)에 전국에서 119개의 쇠말뚝을 뽑아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창경궁 바위에 꽂힌 쇠말뚝을 철저 조사하라는 말도 나왔다. 확증은 없고 추측이 난무했다. 이제야 역사를 바로 세우게 됐다는 환호 한쪽에서 의문도 나왔다. 풍수 침략용 쇠말뚝이라면 극비로 진행했어도 단서는 남기 마련인데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 말뚝이 박힌 자리도 혈처라고 보기에는 엉뚱한 곳이 많았다.

2019년 건축가 서현은 기고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민족정기 말살 목적으로 일제가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분노의 증언도 있다. 그러나 주요 지점에 물리적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은 기본 사안이다. 측량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것이 주술적 만행으로 보였을 수 있다.”
이에 앞서 1999년 역사학자 고 이이화는 저서 『이이화의 역사 풍속 기행』(역사비평)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해도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 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측량 표지인 대삼 각점 소 삼각점을 일제의 풍수 침략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등산로 철제 난간이나 군사지역의 목재 전신주를 일제 말뚝이라고 주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은 책방 서생의 편견이다, 측량 삼각점이 아닌 곳에 박힌 말뚝은 뭔가, 위치표시용 말뚝을 1m 이상 박을 필요가 있나, 측량에 80kg짜리 쇠말뚝이 왜 필요한가, 표지용으로 쇠말뚝을 쓰지 않는다….
논란의 와중에 독립기념관에 전시하던 쇠말뚝은 사라졌다.

 

 

 

 

 

서울 한복판에 대일본(大日本)이라니

옛 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국립박물관) 철거 때와 서울시청 신청사 공사 때 일이다. 하늘에서 광화문 일대를 내려다보면 ‘大日本’ 글자가 드러난다는 얘기가 돌았다. 백악산이 大,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 옛 서울시청 건물이 本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를 내세워, 서울시는 2009년 새로 짓는 청사 뒤쪽 태평홀을 헐어내겠다고 발표했다. 本자를 지우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건물 설계에 참여한 사사 게이이치가 1926년 〈조선과 건축〉에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 의장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
의장은 태평홀을 말한다. 담당자가 本이 아닌 弓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결국 등록문화재 52호인 옛 청사 태평홀은 일부가 뜯겨 나가고 새 청사가 들어섰다.

1. 조선시대 하륜이 한양 도읍으로 천거한 무악(연세대 일대). 2. 청와대. 3. 용산 대통령 집무실

백악에서 용산까지

청와대와 용산 대통령 집무실은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용산 집무실은 백악산~인왕산~사직터널~서울시교육청~경향신문사~서소문~숭례문~남산 백범광장~남산 능선~하얏트호텔~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녹사평역~둔지산 능선이다. 새 집무실은 능선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백악산에서 한양 도성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절반을 돌아서 내려간 자리다. 능선은 서울이 확장하며 깎여 낮아진 곳이 있고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곳도 있다.

 

 

 

 

 

 

 

 

 

 

 

북한산에서 용산까지 흐르는 산 능선.

용산은 본래 편안한 땅이 아니었다. 고려 숙종 때 천도를 계획하며 서울 일대를 돌아본 조사단이 용산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코앞에 흐르는 한강 때문이다. 지형상 외적이 강을 거슬러 공격해오면 방어가 마땅치 않다. 본래 한강은 모래사장과 습지가 많았다. 홍수가 나면 자주 물길이 바뀌었다. 만초천을 역류한 물이 삼각지와 서울역을 거쳐 숭례문 근처까지 들어온 기록도 있다. 만초천 지류 하나가 삼각지 전쟁기념관 뒤로 흐르니 용산 일대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을 테다.

 

 

 

 

 

 

 

 

 

 

 

 

 

 

1940년대 미군이 작성한 지도를 보면 경원선(지금의 경의 중앙선) 밖으로는 모래사장 밖에 없다. 한강 치수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강변북로가 1986년에 올림픽대로가 뚫리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부이촌동 신동아 아파트가 1984년에 들어섰으니 그때까지 이렇다 할 시설이 없었다. 남산은 청와대의 백악산처럼 든든한 배경이 되지 않는다. 과거 논리라면 집무실 이전은 생각지도 못할 조건이지만 그간 서울이 발전하며 땅의 모양이 달라졌다.

 

 

 

 

 

 

 

 

1940년대 미군 지도. 이촌역과 서빙고역 앞쪽으로는 모두 모래사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양옆으로 둔지산에서 나오는 개울이 보이고, 한강의 흐름도 지금과 많이 다르다.

 

 

 

 

 

 

 

 

조선의 왕들도 집무실을 옮겨 다녔다. 조선 500년 동안 경복궁이 제1궁 역할을 한 시기는 200년 남짓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뒤 왕들은 창덕궁과 덕수궁(경운궁) 등에 머물렀다. 궁을 복원할 여력이 없어 경복궁은 오랫동안 폐허였다. 정부 수립 뒤 77년 동안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 자리에 머물렀다. 역사 속에서 보면 길지 않은 기간이다.

 

 

 

 

 

 

 

 


수도 이전 논의가 수차례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번 추진했다. 첫 시도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공주시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 일대에 임시 행정수도 만들려던 계획이었다. 1979년 서거하며 없던 일이 됐다.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만들려던 노무현 대통령의 시도는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려 계획을 축소했다.
물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수도 이전이 아니다.

땅의 팔자 또는 운명

 

 

 

 

 

 

 

 

 

 

 

 

 

 

 

 

청와대 이전 얘기가 나오며 풍수가 다시 화제에 올랐다. 청와대가 흉 지라는 얘기는 1992년 노태우 정부 때 최장조 전 교수의 기고문에서 비롯했다.
“… 청와대 자리가 서울 임자 되는 산의 중턱에 자리 잡음으로서 풍수가 금기시하는 성역을 차지하게 되어 살아있는 사람이 터전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신적 권위를 가진 자리가 되었고 또한 적어도 청와대는 풍수상 죽은 사람 혹은 신 같은 존재만이 살 수 있는 땅이므로 옮겨가야 한다 …”(동아일보 1992년 7월 29일 자 칼럼)
2019년 유홍준 교수도 문재인 정부 시절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라고 밝혔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최근 청와대를 둘러본 풍수전문가 김두규 교수는 생각이 다르다.

“(논란이 많지만) 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다.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 느낌이 포근함인데, 이는 좋은 땅의 기본 조건이다. 청와대 터를 완전한 길지라고 보기도 어렵겠지만, 1000년 동안 각 시대마다 한 국가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점만 봐도 흉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지기가 쇠했다는 말도 있지만 땅이 기운을 잃었다면 이렇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겠나. 꾸준히 청와대 터 바위 지형의 단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청와대 경내에 흙으로 이뤄진 지형들이 많이 있다. 와서 보니 중출 맥을 따라 내려오는 곳은 대부분 흙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는 굽이쳐 내려오는 용맥이 걸림돌(바위) 없이 순탄하게 내려왔다는 의미다” (매경 LUXMEN 2022.6 )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다. 당사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정반대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땅의 운명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모래벌판이던 잠실은 아파트 숲이 되고, 쓰레기 산 난지도 일대에 디지털미디어센터가 들어서고, 비만 오면 물이 차던 망원동은 청춘 핫 플레이스가 됐다. 교외 공동묘지 자리에 고급주택단지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경우도 많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큰돈을 번 이유가 드라마틱하다. 사업을 위해 중국과 홍콩을 드나들며 동양인들의 풍수 정서에 주목했다. 이를 거꾸로 이용해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버려진 강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초고층 아파트로 줄줄이 개발했다. 전망을 확보하려 땅의 지형을 바꾸는 일은 기본이었다.

 

 

 

 

 

 

 

 

 

 

땅의 팔자는 사람의 의지, 발전하는 기술, 자본의 논리가 결정한다. 일제 쇠말뚝을 박았건 말건, 청와대 터가 어떻건 그동안 한국은 셀 수 없는 인재가 나오고 G10 대열에 진입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청와대는 모두의 공간이 됐고, 용산은 또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청와대 경복궁 일대는 유동인구가 늘어 활기가 넘친다. 용산 미군기지 반환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두 동네 모두 손실보다는 이익이 많다.

일직선 위에서 놓이게 된 이유

 

 

 

 

 

 

 

 

 

 

 

 

서울의 핵심 유산과 시설들은 왜 북한산과 관악산 사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을까. 이는 역사가 말해준다. 백악산~관악산 축은 한양 건설 때 중심축이었다. 백악산 남쪽으로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자리를 잡고 그 인근에 부대시설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도시구조가 크게 바뀐다. 한강 이남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오려면 관악산을 돌아서 들어와야 한다. 일제는 지형이 평탄한 관악산 서쪽으로 대로와 철도를 냈다. 안양~영등포~노량진~용산~서울역 노선이다. 관악산 동쪽 남태령이나 양재 쪽은 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교통축을 따라 용산역, 서울역, 시청이 들어섰다. 용산은 오랜 기간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지였다. 덕분에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서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갈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서울 현충원 안에 있는 창빈 안 씨 묘역.

 

 

 

 

 

 

 

 

 

 

동작동 서울현충원은 1955년에 생겼지만 조선 때부터 풍수와 연관이 깊다. 현충원 묘역의 원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안 씨 묘역이다. 현충원이 들어서기 400여 년 전인 1550년에 생겼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장흥에서 이장을 해왔다. 그 뒤 손자인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 후궁의 자손으로는 처음이다. 이후 조선의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이런 자리에 1955년 7월 국군묘지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을 안장하는 자리였다. 일대가 조선 때부터 국가 소유였기에 조성이 쉬웠다. 1965년에는 국립묘지로 승격되며 군인 아닌 국가유공자들도 안장하게 됐다. 명당의 기를 받고자 했을까. 창빈 안 씨 묘역 주위에 역대 대통령들이 묻혀있다. 뒤에 박정희, 옆에 김대중, 앞에 이승만, 건너편에 김영삼. 이제는 빈자리가 없다.
역사 속의 필연과 우연이 이들을 일직선 위에 올려놓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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